잠시 맡긴 것

잠시 맡긴 것


[잠시 맡긴 것]

쌀가게 점원에서 대기업은 이룬 현대 고 정주영회장이 그가 쌀가게에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쌀 한 가마니를 자전거에 싣고 가다 넘어졌습니다. 그것이 너무 못마땅해서 밤새도록 자전거에 쌀 한가마니를 싣고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대만의 최고 부자였던 왕융칭 회장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쌀가게에 점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1년후 16세 되던해에 후미진 장소에 쌀가게를 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쌀가게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기존의 시장을 점유하기가 너무도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쌀을 노지에서 말려서 돌이 많이 들어갔던 때였습니다. 그는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 쌀의 돌을 골라내어 ‘돌없는 쌀’이라고 크게 써 붙였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노인들이 많이 사러 와서 직접 배달까지 해주며 쌀독에서 묵은 쌀은 퍼내고 햅쌀을 붓고 위에다 묵은 쌀을 붓는 성의를 보였습니다. 그는 쌀가게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2차 세계 대전 때 모든 걸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 거위를 키웠습니다. 당시는 먹을게 귀한 시절이라 거위 또한 야위었습니다만 그는 쌀겨와 왕겨 그리고 배추 껍질을 썰어 넣은 특유의 먹이를 주어 거위가 아주 살이 찌고 튼튼했습니다. 그는 거위값을 2배나 비싸게 받았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이재에 밝은 반면 또한 세심함으로 대만에서 대기업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이룬 사업은 처음에는 포모사라는 타이어 회사와 자동차, 방직, 화학섬유, 화학, 중공업, 물류등 30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포모사는 거대기업으로 발돋음 했습니다.

그는 고 정주영회장처럼 너무도 근검 절약하는 스타일 이었습니다. 때수건을 30년간 1개밖에 쓰질 않았고 평생 양복 5벌로 지냈으며 딸 결혼 때 혼수품으로 면도기 하나 보내준 게 모두 다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수전노처럼 모은 재산을 기부나 나누는 데는 아주 통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1963년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명지공업전문대학 설립했고 1976년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비영리재단 장경기념병원 설립 했습니다.
(現 장경대학으로 발전)
1980년 생활환경개선 연구센터 설립했으며 1985년에는 포모사 경영방식을 전수하는 연수지원센터 설립(중소기업 책임자 및 간부 대상)했습니다.

2008년 10월 15일 왕융칭 회장은 별세 했습니다. 그가 기부한 금액은 총 9조원이나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남긴 유언에서 “누구나 부(富)를 바라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떠날 때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돈은 하늘이 우리에게 좋은 용도로 사용하라고 잠시 맡긴 것일 뿐, 누구도 진정 이를 소유할 순 없다. 인생 최대의 가치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에 공헌하고 아름다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목표 덕분에 긴 세월 결코 나태할 수 없었다.”

돈은 소유하는 것일까요? 나누는 것일까요? 옛말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쓰라고 했습니다만 개처럼 버는 사람은 많지만 정승 같은 분은 참으로 드문 것 같습니다.

-스토리 메이커 박성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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