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출연료
폴란드 출신으로 세계적 명성을 날린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얼마나 연습 벌레인지 하루에 6시간 이상씩을 하루도 빠짐없이 피아노를 연습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친구가 찾아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흠잡을 데가 없는 아주 훌륭한 연주가인데 매일 그렇게 열심히 연습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자 그는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평론가들이 알고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지” 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바로 파데레프스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뛰어난 연주실력으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는 그의나라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유럽과 미국등지를 다니며 자주 자선모금 음악회등을 열었습니다.
그는 자국의 독립을 위해 참으로 많이 헌신했습니다. 한번은 1892년에 미국으로 연주를 하러 갔습니다. 그때 허버트 후버라는 사람은 자신의 거주지인 켈리포니아로 파데레프스키가 온다는 소식을 알고 그에게 출연료로 2.0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파데레프스키의 출연료는 세계적으로 가장 비쌌다고 할 정도 였습니다.(지금도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기록이 깨어지지 않는다고 함) 그것을 개의치 않고 파데레프스키는 연주하기로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후버의 예상과는 달리 표가 제대로 팔리질 않아 400달러가 모자란 1.600달러밖에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학비를 위해 후버가 너무도 동부서주하는 열정에 감동한 파데레프스키는 받았던 1.600달러 마져 그에게 다시 돌려 주었습니다.
그러한 예술가로선 흔치않은 통큰 심려깊은 배려때문인지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피아니스트 출신으로는 전후후무한 신생독립 공화국의 외무부 장관을 겸한 초대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 황폐된 토지와 여러가지 여건으로 나라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급한것은 식량문제 였습니다. 국민들은 폭동이 일어나고 야당은 연일 사퇴압력을 가해왔습니다. 파데레프스키는 인접 유럽국가들에게 간절한 도움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 당하였습니다.
1919년 그 당시 미국의 후버는 미국이 전쟁 피해국에 식량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인 미국 식량 구호국(ARA)의 초대 국장으로 있었습니다.
그가 국장을 맡은 후 여러 유럽국가들 중에 식량을 지원하기 위해 상황을 검토하던 중 폴란드의 식량위기와 일전의 파데레프스키에 대한 사실을 알고 식량을 전적으로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 양은 자그만치 폴란드 국민이 1년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습니다. 그것으로 파데레프스키가 식량위기를 넘기게 했습니다. (MBC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 그후 파데레프스키는 수상직을 사임하고 다시 연주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활동하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급성폐렴으로 그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그는 알링턴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1991년에 폴란드로 이장되어서 바르샤바 대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파데레프스키의 한번의 선처가 엄청난 결실을 맺었습니다. 식물 학자들은 실과의 열매는 처음에는 30배 나중 60배 최고는 100까지 과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으로 인한 파데레프스키의 씨앗은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결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남을 위해 무심코 한 배려는 땅에다 던진 씨앗처럼 결국 자신에게 결실로 돌아옵니다.
-박성목 / ‘가슴으로 읽는 따뜻한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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