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용 닭도리탕

조형용 닭도리탕


[조형용 닭도리탕]

어느 퇴근길. 아까부터 서너 걸음 뒤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내 앞엔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 낯 익은 모습의 초라한 행색의 한 중년 여인이 있었다. 누구지?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 한 토막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바로 친구 형용이의 부인이다.

그래, 20여년 전 결혼하고 서울 근처에 신접 살림 냈다며 경기 부천역 부근의 방 둘 짜리 300만원 전세집에서 친구들 불러 집들이했던 중학 동창 조형용의 부인이다. 차린 건 많지 않았지만 정성이 묻어났고 우리는 그날 맥주와 소주를 벗삼아 옛 얘기하며 밤을 지새웠지. 그리고 그게 전부였나보다. 그 친구는 리비아의 아랍대수로 건설 공사 현장으로 떠났고 무심한 우리들은 그 뒷 소식조차 챙겨보지 않은 채 여기까지 달려왔다.

운좋게 아직 대기업 계열사에 부장으로 있는 난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부천 집들이에 갔던 벗들도 하나 둘 명퇴다 정리해고다 구조조정이다 하는 두어 차례의 칼바람을 벗어날 수 없었고 요즘은 아예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된 셈이다. 가끔씩 생각 나 홀로 포장마차에서 비우는 소주와 벗하는 추억으로만 곱씹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왜? 이름을 기억 못하는 내 머리에 너무 화가 났지만 “저…혹시 형용이 부인… 아니시던가요?”란 말로 그녀에게 첫 말을 건넸다. 그녀는 어색하고 또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금 남편이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고 답한다. 반갑기도 했지만 무슨 급한 상황이 생겼다는 느낌에 함께 그곳에 가자고 했더니 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남편은 중동에서 돌아와 그럭저럭 거기서 번 돈으로 지내왔는데 3년 전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반복하던 끝에 결국 다음주면 생을 마감할 거라는 병원의 통보를 받았다는 거다. 그

러면 이승을 떠나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야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그녀는 내게 용건을 말한다. 아무도 없어 나를 찾아왔노라고. 중환자실 입원 이전까지 나온 병원비는 부천에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어렵게 사는 친정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아 지불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는 거였다. 병원측은 당장 이삼일 내로 밀린 병원비 3천만원을 내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내보내겠다는 거였다. 평생을 가족 위해 살아온 남편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눈물섞인 형용의 부인의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나라고 월급쟁이인데 뭔 대수가 있을까? 순간, 카톡을 통해 온라인상으로 자주 대화가 되는 벗들이 떠올랐다. 일단 형용의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함께 들어갔다. 거실에서 집사람과 옛 얘기 잠깐 시키고는 동창생의 마당발인 이시무라는 이름의 총무에게 전화를 했다. 사정이 이런데 내가 좀 여유가 있으니 1천만원 마련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시무는 자기도 은행 빚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정리되었고 보험 겸 저축상품 장기가입한 거 해지하면 5백만원은 모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친구들에게 사정을 전하겠다고 했다. 많은 동창들이 적게는 몇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수백만원에 이르는 돈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시무 계좌로 보냈다.

형용은 3천만원 조금 넘게 돈이 모아지던 날 새벽 눈을 감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친구들에게 하늘에 가서라도 그 은혜 갚겠다는 말을 아내와 두 남매 앞에서 남기고…. 우린 모두 벽제 장례식장에서 그를 한 줌 재로 보냈다. 돌아오는 길 진관사길 하늘은 잿빛이었다. 아니, 우리 모두의 가슴은 먹빛이었다. 차창도 울고 가로수도 울었다. 우리 모두가 울었다. 10여년 전의 일은 그렇게 우리들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져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형용의 부인은 서울 변두리에서 테이블 두 개짜리 조그마한 닭도리탕 집을 냈다. 처음엔 모든 게 서툴렀다. 설익은 감자를 내동댕이치며 육두문자로 시비거는 주정꾼들은 그래도 나은 손님이었다. 인근에 먼저 영업 하던 큰 식당 주인 부부가 와서 괜시리 욕하며 여자 혼자 남자 꼬시려고 하느냐며 비아냥거릴 땐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그 모든 걸 딛고 섰다. 먼저 가장 신선한 채소와 가장 맛있는 고춧가루를 확보했다. 그리고 김치며 밥을 손수 정성껏 만들었다. 육수를 만들기 위해 별도로 닭 두 마리를 따로 투자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그녀는 다른 곳에선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최고의 닭도리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인근에 금세 소문이 퍼졌다. 그 맛과 정성이 명성을 만들었다. ‘식객’을 쓴 허영만 선생이 찾아와서는 최고의 찬사와 함께 ‘조선반도 최고 닭도리탕’ 이라 쓴 사인을 남겨줬다.

그렇게 해서 은 지금 월 매출만 1천만원이 넘을 정도로 단골이 늘었고 상표등록까지 마친 서울 최고의 맛집이 되었다.

밴드를 통해 늘 만남을 실천해온 번개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에 모여들었다. 동창 6백명 가운데 그 집 모르는 친구는 없었다. 멀리 천안에서, 강릉에서조차 가족들 서울 행사를 그 집에서 했다. 괴산에서 프리 랜지로 들판에 풀어놓고 키우는 토종 자연 청정 양계업을 하는 또 다른 동창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영원히 최고의 닭을 생산원가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식사 때마다 대기하는 손님 줄이 2백미터 넘게 길게 늘어설 정도였다.

형용의 아들은 가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자랐다. 바르게 자식 교육에 힘써온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은 한국의 국가대표 기업인 현기자동차의 전략기획실에 입사, 글로벌 마케팅 아이디어로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초석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형용의 아내가 내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저도 형용씨 친구분들 밴드에 정식 멤버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는 없는가요?” 물론 예쓰다. 누구에게 물을 것도 없이 예쓰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시무에게도 전했다. 시무는 고지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를 이렇게 결속시켜준 형용이 가입하는 것보다 100배 더 반가운 일이라며 그녀를 밴드로 불렀다.

그녀는 밴드가입 인사를 이렇게 했다.

“세상에~ 저는 수어지교니 문경지교니 하는 말들은 그냥 책에서나 있는 말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형용씨가 친구들한테 잘 한 것도 없는데 어쩌면 친구들의 사랑이 이렇게 클 수 있는지 참으로 고마웠어요. 전 정말 기대하지도 못했어요. 제가 그 은혜 평생 갚아나가며 살게요. 그리고 형용씨와 제가 만들어 키운 저희 큰 녀석이 지난달 좋은 아이디어로 마케팅 실적 높였다는 공로로 회사로부터 특별 인센티브 5천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 전액을 저도 회원이 된 이 밴드, 바로 우리 남편의 동창생 모임의 기금으로 기부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바로 우리 모두의 우정이었고, 우리 모두의 사랑이었다. 우리 모두는 뜨거운 물줄기가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걸 그 밴드 글 읽으며 억제할 수 없었다. 친구의 이름으로 살아있는 그 닭도리탕집은 전 세계 어떤 식당보다도 가장 눈물깊은 사연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어떤 식당도 해내지 못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편안한 벗들의 안방이 되었다.

오늘 봄볕이 무척 따사롭다. 이 저녁, 퇴근길이 무척이나 가볍다. 아니 기대가 가득하다. 분명, 굳이 밴드에 고지하지 않아도 늘 600명 가운데 10여 명은 그곳에서 감자와 닭다리를 뜯으며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웃고 떠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말이다.

사랑과 우정의 크기는 어느 게 더 클까? 그 부등호의 결말을 혼자 셈해보며 회사를 나선다. 오늘은 형용의 아내를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오메기떡 한 봉지를 사가야겠다.

-‘어느 고등학교 동창밴드’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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