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자리
이슬에 젖은 무릎으로 저녁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앉아있지 짧은 봄볕의 꼬리까지 저금해 둔 나무들은 여름을 인출해 넉넉하게 그늘을 깔아두었지
산의 능선쯤에서 소리 없이 밀고 당기는 기운에 서쪽의 눈자위가 붉어지고
소멸되고 태어나는 빛과 어둠의 지루한 릴레이
그렇게 낮과 밤을 절반씩 나눠 가지며 하루는 경계선을 넘어가고 알람을 켜고 끄며 우리도 조금씩 시들어가지
천년처럼 길고 하루처럼 짧은 시간을
목에 걸고 숲에서 걸어 나와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퉁퉁 부은 저녁의 발등들
사람보다 질긴 나무는 교대식을 마친 밤의 옷자락을 나뭇가지에 걸어두지 하늘로 뻗친 가지 끝으로 새벽이 팔랑팔랑 피어오를 때까지
짧아지고 길어지는 그림자를 가늠하며 세상에 풀어놓은 빛을 거두어들일 시간
한 그루 나무를 붙잡고 나이테를 새기고
계절을 돌아 나온 쓸쓸한 저녁의 낯빛들
아름드리 회화나무 그늘에는 밤이 오기 전 돌아가야 할 저녁이 늘 거기에 앉아있지
-홍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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