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묵상

영혼의 묵상


[영혼의 묵상]

세기의 명지휘자로 손꼽히는 캬라얀은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연주를 들으면 단순히 자신의 귀에 너무 황홀할 정도가 아니라 무형의 소리음이 실제로 유형으로 자신의 가슴에 엄청난 선율의 감동으로 와 닿는다고 합니다.

캬라얀은 눈을 감고 지휘하는 지휘자로 어떤 사람은 눈이 어두워 전 곡을 외워서 지휘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어떤 지휘자도 해낼 수 없는 영혼의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그가 눈을 감고 묵상의 연주를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1956년 짤즈부르크에서 캬라얀이 어떤 여성 피아니스트와 협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토스카니를 능가하는 최고의 지휘자로서 그 명성은 가는 곳마다 자자했고 넘실거리는 머릿결과 외모 때문에 캬라얀의 지휘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연주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연주회가 시작되면서 그가 지휘봉을 들자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그의 지휘봉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와 함께 협연하는 피아노 연주자에게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오로지 캬라얀의 명 지휘에서 나오는 명연주를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윽고 그리고 천천히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객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자 그만 그녀의 연주에 압도 되어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만 쏠렸습니다. 그리고 명지휘자 캬라얀이 아닌 그녀에게 모든 정신을 쏟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의 연주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 우연찮게도 객석에 앉아 있었던 구소련 국보급 피아니스트 였던 타티아나 니콜라예비는 문화외교사절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방문하여 하스킬의 연주를 들었을 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녀의 몸은 뒤틀려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마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베를린 필을 지휘하던 카라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건반으로 손을 옮기자 곧 나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실로 내가 평생 동안 들은 최고의 모차르트 전문가였다. 그녀의 마력은 너무나 강력해서 오케스트라 총주가 다시 울려 퍼질 때에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풍부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음이 오케스트라에게 전달되어 지휘자마저 마술에 걸려 있었다. 그녀 덕택에 그들 모두는 음악적 진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콘서트였던 것이다 “라고…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클라라 하스킬은 음악의 신동으로 5살 때 한번 들은 모짜르트 소나타 한 악장을 외워서 연주했고 연이어 조를 바꿔 한 번 더 연주를 할 정도였습니다. 11살 때 파리 음악원을 입학해서 4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대 거장들과 연주를 하며 해성처럼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18세에 다발성 신경경화증으로 신경과 근육이 녹아 붙는 희귀병으로 4년간 기브스를 해야 했고 그녀의 척추는 척추측만증으로 점점 굽어져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면서 연주 활동은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1.2차 세계대전 내내 병마와 싸워야 했고 유대인이었던 그녀는 2차 세계대전 당시는 스위스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그 후에도 뇌에 악성 종양이 생겨 가까스로 수술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하스킬은 몇 번의 고통을 이겨내며 마침내 1947년부터 다시 계속된 연주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60년 12월 6일 그녀는 브뤼셀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다 굴러 떨어져 그 다음날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저는 항상 벼랑에 서 있었지요. 그러나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한 번도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피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신의 도우심 이었습니다. “

그녀는 자신에게 닥쳤던 이 모든 엄청난 불행의 조건을 음악적 긍정으로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다가온 불행에 시선을 두지 않고 도리어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재능에 감사했습니다. 그녀의 묵상은 불행도 행복도 초월한 신의 섭리를 찾아가는, 모든 것을 감사하는 영혼의 묵상이었습니다.

-스토리 메이커 박성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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