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앞에서

세월 앞에서


[세월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삶의 긍정을 실하게 챙겨 들고
가는 해와 오는 해의 교차로에 서 보기로 하자.

숙연히 고개 숙여지고 가슴속엔 참숯
숯불화로, 불씨 가득 붐비고들 있다.

그의 탓이라 그의 탓이라고만 말고
나의 탓이러니 나의 탓이러니 뉘우침 삭이면서
용서와 안아 들임을 넉넉히 마련하기로 하자.

찰랑이는 옥빛 물을 머리 위에 이고 가는
옛날 연인들, 우리도 그와 같이 한다면 삶의
목마름을 그 물로 해갈하게 되리라.

하지만 이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세상살이 그렇게 톱니바퀴 맞물리듯 만만하게
보았더냐고 반문하는 그 음성을.

사실로 말하건대 우리의 현실은 소리를 지를
만큼 슬프고 원통할 때가 허다하다.
일 년 내내 시린 손이요. 빈손이었다고
말할 사람도 많으리라.

더하여 왜들 싸움질만 하느냐고 들끓는
요소가 원망스러웠고, 도처에 단절의 철망들이
쳐져서 자칫 넘어지는 사람, 그 위에 넘어지는
사람들. 사람의 부끄러움이여. 그렇다고
이대로 침몰할 것인가.

유실과 절망뿐이라고 손을 털고
삶을 둘러 세울 것인가.

어림없는 소리, 결단코 안 될 일이다.
우리는 여럿이고 이 개명한 중지의 시대에
궁리를 합하고 대열을 정비한다면,
상쾌한 하늘 폭포로 목욕하고 은혜로 세례식을
거친다면, 다시 한 번 새 삶의 印(인)을 받는다면
막힘이 어디 있고 좌절이 웬 말이리.

분발할 정말로,
슬프고 분하거든, 한 번 더 설계하고
초석의 단계부터 벽돌을 쌓아 올리자.

잃어버린 기쁨들을 찾아내자.
燈皮(등피)를 닦고 깨끗한 새 기름을 채운 램프엔
살아 펄럭이는 진홍의 불송이를 담아 두자.

화해, 협동, 재창조 등 우리가 수없이
그 어휘를 주무르던 부러운 말들과,
그 충실한 내용들로 세상을 가득
채워 버리자.

삶의 가장 좋은 긍정들을
이에 대령하자.

-김남조 ‘끝나는 고통 끝없는 사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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