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신발 / 류시화
어느 겨울날, 누가 대문을 두들겨서 나가 보니 건너편 집에 사는 아이가 서 있었다.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다운증후군 아이였다.
나를 보자 아이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에 직박구리새가 쥐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죽은 새였다.
어디서 발견했느냐고 자초지종을 물을 틈도 없이 아이는 약간 더듬거리는 투로 그 새를 마당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 집에는 마당이 없어서 묻어 줄 곳이 없다며.
그렇게 새를 건네주고 아이는 돌아갔다. 갑자기 손에 들린 죽은 새를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그자리에 서 있었다.
참새, 박새와 함께 내 작업실 마당에 곧잘 날아와 봄이면자목련 꽃술을 따먹는 새가 직박구리이다. 직박구리는 늘 암수가 함께 다닌다. 혼자 왔나 싶어 두리번거리면 살구나무에 짝이 앉아 있다.
호미를 가져다 살구나무 아래를 파기 시작했다. 큰 새가 아니라서 작은 구덩이로 충분했다. 그런데 꽁꽁 언 땅을 파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호미 날이 돌에 부딪쳐 불꽃이 튀었다. 그때 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 보니 아이가 다시 와서 서 있었다.
옆에 초인종이 있는데도 주먹으로 나무 대문을 두들기는 편을 좋아하는 듯했다.
호미를 들고 있는 내게 아이는 자신의 낡은 신발 한 짝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가 묻기도 전에 말했다.
“추우니까 새를 이 신발 안에 넣어서 묻어 주세요.”
그러고는 나머지 신발 하나만 신은 채로 약간 절뚝거리며 돌아갔다.
나무 밑으로 돌아와 마저 구덩이를 파는 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호미 날이 언 땅에 부딪는 쇳소리가 멎고, 신발 속에 안장된 직박구리를 묻어 주자 이내 눈송이들이 무덤을 덮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신성한 상태로 끌어올리는가?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 후 아이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지만, 살구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 겨울 그 아이가 가져다준 새와 신발이 생각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슴 안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슴을 연 채로 살면 상처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슴을 닫은 채로 사는 것만큼 많이 상처받지는 않는다.
우리의 문제는 단 한 가지가 아닐까? ‘나’의 범위를 너무 ‘나’에게 한정짓는 것 말이다. 그래서 ‘나’ 이외에는 타인, 혹은 타자라고 믿는 것. 반면에 공감과 연민은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만든다.
어느 명상 센터에서는 이렇게 기도한다. 누구라도 이 기도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능한 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갖기를. 만약 내가 이 순간에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내가 친절하기를. 만약 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판단하지 않기를.
만약 내가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해를 끼치지 않기를. 그리고 만약 내가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최소한의 해를 끼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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