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에 대한 반론’/ 조영란
사랑이 아니어서 외롭고
사랑이어서 외로우므로 우리는 식을 수밖에 없다
끓어오르다 서둘러 저무는 본성 탓이 아니다
요람이자 무덤인 한 세계에서
한통속이 된다는 건 은밀하고 충분히 즐거운 일
너는 끓고 나도 들썩였지만 우리는 넘치지 못했다
우리가 태워버린 것은 서로의 슬픔,
눌어붙은 체념은 명치에 검은 지문을 남겼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별은 어디에나 있다
가능과 불가능 사이
곁이었으나 곁이 될 수 없었던 결벽의 벽 앞에서
우리가 한 일은
가슴속 사나운 짐승 한 마리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낸 것
뜨거움이 빠져나간 서늘한 절제와
기약할 약속이 없어 더 단단해지는 결속,
그게 우리의 사랑이다
슬픔으로 그을린 가슴 언저리에 불씨 한 점 살아난다
식는 건 쉽지만
다시 달아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다
식은 만큼 뜨거워지고
멀어진 만큼 가까워지는 그것 또한 우리의 사랑이다
그러니 통속적인 하루처럼 자신을 사랑할 것
그래야 뜨겁게 식을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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